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
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
나는 귀를 잘라버렸다
손에 쥔 칼날 끝에서
빨간 버찌가
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
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
들을 수 있었다
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
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
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
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
커다란 귀를 잘라
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
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
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
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
-<고흐>
어두운 복도 끝에서 괘종시계 치는 소리
1시와 2시 사이에도
11시와 12시 사이에도
똑같이 한 번만 울리는 것
그것은 뜻하지 않은 환기, 소득 없는 각성
몇 시와 몇 시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는지
알려주지 않는다
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
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
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
죽을 때까지 기억난다
-<서른>
높은 데서 떨어지고 싶다
식물원 천장, 빛의 유리창을 박살내고
땅 위를 걷는 새들 지나
하수구 바닥에 모인 검은 쥐떼에게
잠시 목례하고
계속 떨어지고 싶다
암매장된 부랑자의 흰 뼈를 어루만지며
흐르는 젖은 노래에게로
- <추락>
내 가슴엔
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
살고 있어
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
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
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
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
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
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
- <대학 시절>
나
나
나
나
는 공사판으로 내려온 눈송이
한 일이라곤 증발하는 것뿐이었다.
다른 눈송이들이 인부의 어깨를 적시는 동안
다른 눈송이들이 거리를 덧칠하는 동안
다른 눈송이들이 아이들의 다리를 흔드는 동안
한 일이라곤 증발하는 일,
낼름거리는 불꽃의 드럼통 속으로
-<어느 눈 오는 날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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